우리나라의 로켓에 관심이 많은 국민의 한사람입니다.

모든 분들의 노고와 헌신에 응원합니다.

 

근데 중대한 문제점을 발견했네요. 절대로 웃어넘기지 못할 문제점입니다.

영상보면 작업장 근처에 안전모가 있는데, 그게 있다는 것은 작업시 항상 안전모를 착용하라는 것입니다.

근데 조립과정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안전모 착용을 하지 않고 있네요.

 

산업안전에 대한 고용주 책임자 처벌이 약한 우리나라여서 그렇겠지만, 그걸 떠나서 반드시 힘들고 덥고 불편하더라도, 반드시 안전모 쓰고 작업하길

혈세 내는 사람으로써 강력하게 지시합니다.

 

안전모를 착용하므로써 뭔가 불편하거나 불합리한 점이 있다면 그것을 개선해야지 안전모를 벗는 것은 안됩니다.

 

산업안전으로 올해만 해도 몇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고 죽어갔습니다.  

고용주 사장의 직급 목아지를 자르는 책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법을 만들어서라도  이를 보호하면 좋겠습니다.

종이호랑이 법이 아닌, 다시는 사업 못하게 막는 정도의 강력한 법.

 

그래서  KARI  원장과  ,  환화 에어로스페이스 사장이 댕강될 수 있는 법이 없는한.

솔선 수범하여 여러분은 안전모 쓰고 작업하길 지시합니다.

 

https://youtu.be/7GlGvVsjKgA

태양광발전 8년… 햇살 통해 임하는 성령 느껴

녹색교회로 자리잡은 부천 지평교회 이야기

부천=진삼열 기자
입력 2014-09-01 03:06

태양광발전 8년… 햇살 통해 임하는 성령 느껴 기사의 사진
경기도 부천 지평교회 옥상에 있는 태양광발전기 옆에서 포즈를 취한 이택규 목사. 이 목사는 “하나님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교회가 환경보호 사역에 적극 나서야한다”고 말했다. 부천=허란 인턴기자
5층 건물에는 간판이 없었다. 옥상에 있는 십자가가 교회임을 알려줄 뿐이었다. 하지만 이 건물이 경기도 부천 지평교회라는 걸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십자가 옆으로 검은 색 태양광발전판이 보였기 때문이다. 지평교회는 국내 교회 중 최초로 태양광발전을 시작한 곳이다.

“생각보다 크진 않죠. 이게 태양광발전기입니다. 햇빛이 좋을 땐 시간당 약 4㎾를 만들 수 있어요. 날이 안 좋을 때도 있지만 1년이면 약 3600㎾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주는 은총인 햇빛으로 인간에게 꼭 필요한 전기를 만들 수 있다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령이 햇살을 통해 공동체에 임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지평교회 담임 이택규 목사가 지난 29일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는 태양광발전판 이곳저곳을 사랑스런 손길로 쓰다듬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은 1층 식당 구석 천장에도 전시용으로 만든 소형 태양광발전기가 매달려 있었다. 잠깐 훑어봤는데도 지하 예배당 옆에 달린 ‘녹색교회’라는 타이틀이 꽤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지평교회가 태양광발전기를 설치한 건 8년 전이다. 2006년 초 시민햇빛발전소 박승옥 이사장이 평소 알고 지내던 이 목사에게 연락을 해왔다. “목사님, 햇빛발전소를 세우려고 하는데 옥상을 쓸 수 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 목사는 박 이사장의 제안에 선뜻 그러자고 했다.

운도 따랐다. 설치비는 모두 시민햇빛발전소 조합원들이 부담했다. 지평교회는 그저 옥상만 내주면 되는 조건이었다. 처음 15년 동안은 설치비를 부담한 시민햇빛발전소가, 이후에는 지평교회가 태양광발전기를 운영하기로 했다.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높을 때여서 태양광발전으로 생산한 전기를 한국전력공사에 팔 때의 값도 1㎾ 당 716.4원으로 후하게 책정됐다. 이 덕에 시민햇빛발전소도 총 설치비 2400만원의 절반 이상을 이미 회수했다. 환경을 보호하면서 경제적 이득도 얻은 셈이다.

국내 최초 태양광발전교회 타이틀을 얻은 이후 지평교회는 녹색교회로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산화탄소 다이어트’와 같은 작은 일부터 했다. 매월 네 번째 주일을 ‘자동차 없이 교회 오는 날’로 정해 이산화탄소를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운동이었다. 이후 ‘이산화탄소 가계부’도 만들었다. 각 성도 가정의 전기 사용량을 매달 그래프로 그려 스스로 절약을 생활화할 수 있게 했다.

“성도들이 서로 볼 수 있도록 1층 친교실 벽에 그래프를 붙여 놨어요. 전기 사용량을 그래프로 직접 그리면 경각심을 가질 수 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에너지를 아끼는 효과가 있어요.”

교회 옥상에 텃밭도 만들었다. 이 목사와 성도들은 태양광발전판 옆으로 스티로폼 박스 60여개를 놓고 상추·오이·가지·깻잎 등을 키우고 있다. 지평교회는 여기서 재배된 채소들을 마을 주민과 나눠 먹으며 교제하고 있다. 매달 다섯 번째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생명촛불예배’로 전혀 전기를 쓰지 않는다. 이날만큼은 무더워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추워도 난방을 하지 않는다.

이 목사는 지평교회를 소개하면서도 자신이 부각되는 것은 부끄러워했다. 오랫동안 더 헌신적으로 사역해온 목회자들도 많은데, 태양광과 태양열도 구분하지 못했던 자신이 어느새 환경운동을 대표하는 목회자처럼 돼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환경보호 사역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를 이념적·정치적 시각으로 재단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했다.

“교회에서 환경보호 하자는 게 나쁜 건가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세상을 그저 아름답게 지켜나가자는 겁니다. 그런데 환경보호를 정치적 시각으로 보고 오히려 반대하는 이들이 있어요. 현대사회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사람만을 위한 곳이 돼버렸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교회가 환경보호에 나서야 합니다.”

부천=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출처 : 지평교회-평화와 평등의 공동체
글쓴이 : 장동현 원글보기
메모 :

3년 전 쯤으로 기억합니다. 서른 전후의 젊은 전도사와 짧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느 직장선교회 예배모임에서 젊은이는 찬양인도를, 저는 설교를 맡고 있었지요.  

   
모임이 시작되기 조금 전, 젊은이가 자신이 겪은 불쾌한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인을 ‘양’이라 부르고 자신을 ‘목자’라고 칭하는 그는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는 교인들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성토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무례한 양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젊은이의 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모진 말로 그를 힐난하고 말았습니다. 성서 구절을 인용하며 교인을 양이라 부르는 그의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다음 본문은 그 때 젊은이에게 인용했던 요한의 복음서 21장 15~17절입니다.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양과 목자’의 비유는 히브리성서(구약성서)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는 이런 익숙한 구도를 사용하여 지도자의 책무가 중요함을 제자 베드로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는 독자도 예수께서 ‘양과 목자’의 구도를 사용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오래도록 가르쳐 온대로 양은 교인을, 목자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목회자를 지칭한다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메시지는 명료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양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는 ‘네 양’이 아니라 ‘내 양’이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 너의 양을 돌보아라.”가 아니라 “나의 양을 돌보아라.”입니다.  

이 본문에서 견고하게 접목된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예수와 그의 백성’입니다. 베드로는 이 견고한 연대의 바깥에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굳이 베드로의 자리를 찾는다면, 그는 두 주인공인 ‘예수’와 ‘그의 양’ 사이에서 그들의 돈독한 관계유지를 위해 일하는 조연일 뿐입니다. 좀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면, 베드로의 역할은 이 목장의 드라마에서 목자와 양의 사이에 위치하여 양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돕는 개에 비견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본문의 예수가 사용한 ‘나와 내 백성’ 구도의 원형은 히브리성서에 너무나도 익숙하게 자주 사용되는 ‘하느님과 그의 백성’의 구도입니다. 하느님과 그의 백성은 성서의 두 축이며 주인공입니다. 물론 성서에는 그들의 돈독하고 바른 관계를 위해 일하는 중계자가 있습니다. 왕과 사제, 그리고 예언자입니다.  

권력과 명예, 그리고 백성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 기자들은 그들을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는 사람, 주인이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 주인들(하느님과 그의 백성)을 섬기고 또 섬겨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종’의 자리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종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찾기는 찾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종’이라는 말을 곧잘 쓰니까요.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자리에 있음을 뜻하는 ‘종’이라는 말이 존칭어가 되어 ‘종님’이 되었습니다. ‘종님’이라는 말에서는 진정한 종의 사명, 종의 자세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요즘은 ‘종님’이라는 억지스런 호칭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대신 목회자들이 스스로 부담스런 ‘종’의 자리를 떠나 ‘목자’의 자리로 이동하면서 교인들을 ‘양’으로 만들고 목자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성서가 ‘목자와 양’의 구도를 ‘하느님과 그의 백성’에만 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구도를 ‘지도자와 백성’에게 부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도는 주로 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을 때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목자’에서 찾으려면 그 호칭을 권위를 내세우는데 사용하지 말고 책임을 지는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위의 본문에서 베드로에게 그런 책임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의 물음이 우리말 성서에는 똑같은 단어로 나오지만, 원문에는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 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묻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물음에 대해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필레아합니다.”라고 반복해서 대답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는 세 번째 물음을 “네가 나를 필레아하느냐?”로 바꾸었고,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필레아하는 건 아시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합니다.  

‘아가페’는 신이 그의 백성에게, 또는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무조건적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필레아’는 친구나 학문, 예술 등을 사랑한다고 할 때 사용하는 ‘조건적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무조건적 사랑을 요구하는 예수의 질문에 베드로는 “아가페적 사랑은 자신이 없지만, 조건적이고 제한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라고 답을 한 셈입니다.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했기에 신중해진 것일까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정직한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는 자신의 원래 요구를 철회하고 “네가 할 수 있는 조건적 사랑이라도 열심히 실천하여 내 양을 돌보아라”라고 말씀해 준 셈입니다.  

본문에는 ‘목회관’에 대한 주님과 베드로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자기 백성에 대한 돌봄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제자의 한계를 인정해주고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당신의 백성을 돌볼 것을 당부합니다. 그러나 돌봄의 대상이 ‘너의 양’이 아니라 ‘나의 양’이라는 점은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을 양으로 비유하는 것이 허용되려면 목자는 예수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교인을 양으로, 목회자를 목자로 설정하고 나면 예수의 자리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로 고백됩니다. 그런 예수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에서 얼마나 큰 죄로 간주되는지는 누구보다도 ‘보수정통’ 목회자들이 잘 알 것입니다.  

성서는 이삼천년 전의 시대상황에서 쓰여진 책이기에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한계가 고스란히 담겨있지만, 우리나라 교회 강단에서는 여전히 성서의 권위와 절대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보수 목회자들이 ‘예수와 그의 백성’의 구도로 설정된 ‘양과 목자’의 비유를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종속적 구도로 왜곡하는 것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성서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교인들을 ‘양’이라고 부르고 싶은 목회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목자라 부르지 말고 ‘개’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 이 칼럼은 격월간지 <공동선> 2009년 9+10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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